목소리를 드릴게요


연말결산에서 언급한, 재미있는데 어느 한 구절을 콕 집어 좋다고 말하기 힘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작품의 분위기가 좋아서 그런가?

단편으로 엮인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편은 <모조지구혁명기>였다. 지구를 본뜬 우주 여행지 모조지구와 모조지구의 디자이너에 의해 탄생된 기괴하면서 신비로운 생명들, 그리고 그 곳의 마케터로 취업 사기를 당한 ‘나’. 나열만 해도 이미 재미가 없을 수 없는 조합인데 작가는 여기에 현실 풍자 반 스푼, 로맨스 반 스푼까지 추가한다.

모조지구의 생명들 중 가장 흥미를 끌었던 생명은 천사였다. 인간인 ‘나’와 천사의 로맨스는 둘째치고 천사라는 텍스트 자체가 좋아서이다. 텍스트만 읽어도 왜인지 아름답고 신비한 이미지가 연상되는 게 좋다.

어느날, 나는 천사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한 천사의 이미지 때문에 더 아름답게 느껴진 문장.

“천사가 저를 고르다니요?”
“지구에는 테마파크가 많잖아. 그 광고에 홀려 서류를 보내온 지구인이 자네뿐이었을 거라 생각하나? 그 중에서 자네를 고른거야, 천사가 직접.”
(중략)
천사가 나를 골랐다.
천사가 나를 골랐다는 말에, 그 뒤의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사랑은 인간인 ‘나’만의 감정이었는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쌍방이었음을 깨달는 순간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매일 말 그대로 날개 아래에서 잠들고, 꿈결에도 지구가 그립지 않다.
천사는 날개가 없을 때부터 천사였고, 천사가 내게 주는 안도감은 우주를 샅샅이 뒤져도 다른 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종류이리라 확신했다.

‘나’에게 있어 천사를 정의하는 건 2쌍의 날개도, 9쌍의 날개도 아니다. 천사의 외형은 비현실적이더라도 ‘나’가 천사를 정의하는 방식이나 천사를 향한 마음은 지구의 어느 연인이나 다를 바 없는 보통의 사랑, 보통의 마음들이라는 게 좋았다. 내가 SF작품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서 “인물들의 성별을 모호하게 수정했는데, 어떤 성별로 이 이야기를 읽으셨는지 궁금하다.” 라고 하셨는데 나는 천사는 남자, ‘나’는 여자로 읽었다. 이유가 좀 웃긴데, 천사 읽을 때 윤정한 생각하면서 읽었기 때문이다.

이와 별개로, 다른 사람들은 여-남 또는 여-여로 읽기도 하던데, 나는 작가의 말을 읽기 전까지는 성별이 모호하게 묘사되었는지조차 몰랐다. 너무 당연하게 남-여라고 생각했기에, 내가 편협된 사고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모조지구에는 천사뿐만이 아니라 고양이 인간, 그리고 나팔꽃 언니, 인면어 등등 다양한 생명들이 살아간다. 특히 나팔꽃 언니는 짧게 엑스트라로 등장했지만, 모조지구의 기괴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제일 잘 살린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언니는 모조 지구의 인트라넷 전체를 담당하고 있는 메인 서버이자 나처럼 납치당해 개조까지 당한 피해자였다.
-
유연한 연둣빛 덩굴들이 온몸을 감싸고 있어서, 그 안에 사람이 들었거니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
언니의 몸에서 뻗어나온 가장 굵은 덩굴들은 랜선과 연결되어 있었다.

예전에 서던리치의 예고편에서 잠깐 보았던 식물 인간들이나, 퍼시잭슨 시리즈의 탈리아 그레이스가 떠올랐다. 어떤 형태일지, 또 ‘나’보다도 더 끔찍한 일을 겪은 피해자일텐데 어떤 서사를 지니고 있는지 상상력을 자극하는 인물이었다. 나팔꽃 언니가 모조지구를 떠나서도 씨앗들과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팔꽃 언니뿐만 아니라 서사가 베일에 감춰진 수많은 엑스트라들 때문에 글이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고양이 인간들의 아이들도 그렇다. 고양이 인간의 지시를 지나치게 질서정연하게 따르는 아이들은 왜 고양이 인간을 도울까?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났는지, 또다른 개조의 피해자는 아닌지, 모조지구의 외부인인 ‘나’도 알지 못하고 작가도 설명해주지 않는 물음들이 많다. 상상할 수 있는 공백이 넓어 단편인게 좋으면서도 너무 아쉽다.

***

이러한 sf적 인물들과 배경 외에도 중간중간의 현실적 유머들 또한 포인트이다.

“요즘은 지구에서도 번식을 하지 않는 추세입니다” 라고 대충 말해주었고 우리는 곧 친해질 수 있었다.

ㅋㅎㅋㅎ
외계인에게 설명하는 지구의 저출산 비혼 트렌드..외계인 시점에서 본 지구의 모습은 새로우면서도 어쩔 수없이 웃기다.

전 우주적인 정서는 모르겠지만, 지구에서는 비극의 현장이 명소가 되거든요

마케팅이란..

***

달콤한 색깔의 캡슐에 담겨,
암흑물질을 뚫고 끊임없이 날라가는 브로슈어가
언젠가 당신에게 닿기를.
모조 지구에 천사를 만나러 오세요.

제발 저 좀 데려가주세요..
너무 사랑스러운 엔딩 같다
덕분에 책장을 덮은 이후에도 저 밤하늘 어디에선가 ‘나’와 천사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 같은 기분이다.

나머지 단편들도 가볍게 읽기 좋았다
오로지 재미만을 기준으로 한 개인적 순위는

모조지구 혁명기 > 11분의 1 > 목소리를 드릴게요  >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 = 메달리스트의 좀비 사태 = 리셋 > 리틀 베이비 블루 펄 = 7교시

단편들 대부분 결말까지 물음표 가득이었다.
특히 <11분의 1>이랑 <목소리를 드릴게요>가 유독 그랬다. 주변인들 또는 사회가 주인공에게 강요하는 내용이 비윤리적인데, 주인공과 다른 피해자들이 그걸 너무 담담하게 수용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이라고 넘어가기에는 찝찝한 부분이 너무 많다. 다들 괜찮다는데 나 혼자 납득하지 못하는 느낌이 답답했다.

<리셋>, <7교시>는 비현실적인 미래의 이야기이자 어쩌면 너무나도 현실적인 환경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러한 환경 문제를 주제로 다룬 소설책들을 읽을 때마다 새삼 환경 문제가 21세기의 얼마나 큰 화두가 되었는지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은 왜인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왜냐하면 나는 환경 오염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내가 누리고 있는 많은 편리들을 포기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실천하고 있는 건 분리수거 열심히 하기, 옷 오래 입기, 장바구니 들고 다니기 같은 사소한 것들뿐이다. 이마저도 환경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이라기보다는 별 의식 없이 당연히 해야해서 하는 것들이다.
만약 내가 리셋의 세계관의 ‘나’였으면 환경을 위한 지렁이들의 출현과 인류 문명의 퇴보를 수긍했을까. 저주하는 쪽에 가까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오만한 이야기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많고,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대단하다고 또 본받아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더디게 더 많은 존재들을 존엄과 존중의 테두리 안에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는다.  너무 늦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작가님이 말하시는 희망이 좋다. 나 같은 사람들도, 아닌 사람들도 포함한 그런 희망이겠지..별 의식 없이 당연히 해야하는 사소한 행동들이 모인다면 덜 유해한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네이버 블로그에 작성한 글을 여기에다가도 백업해둡니다. 어쩌다가 블로그가 2개나 되어 버리는 바람에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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